사는게 힘들때,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을때 나의 발버둥

롤체 깎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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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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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스물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생 새내기가 되었다. 저학년 때는 정말 재밌었다.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 일고 열심히 운동하고 열심히 대외활동 하고, 열심히 알바하고, 열심히 사람들 만나고....쉴 시간도 거의 없고 매일 바빠서 정신이 없었지만, 자려고 누으면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학기가 끝나고 나면 스스로 대견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고 앞으로의 내 삶을 고민하고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사는 게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다보니 넘치던 긍정에너지는 고갈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했고, 점점 현실에 집중하지를 못 하게 되었다. 당연히 성적도 안 좋아지고, 게을러졌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갔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었더니 건강도 안 좋아졌다.

 

그렇게 마지막 학기를 맞게 되었고, 얼떨결에 졸업 전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자 했지만,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저 '적당히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있었고, 어느새 그런 삶에 신물이 났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최선의 최선을 다 하지 않았지만,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몇몇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 같았다. 퇴사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최선의 최선을 다하고, 새로운 빛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나는 퇴사를 했다.

 

1년 간 수고했으니 한 달 정도 쉬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나를 잠식했던 게으름이, 쉬는 동안 폭발을 해버렸다. 그리고 한 달이 두 달, 세달이 되었고, 나는 결국 바닥에 누워버렸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회피하기 위해 게임에 몰두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내가 벗어나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마음을 다 잡고, 어떻게든 하루를 알차게 보내보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하루를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내 정신은 육체에 지배를 당해버려, 냉장고에 있는 물을 꺼내마시는 것 이상의 의지를 필요로하는 일은, 머리가 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힘겹게 며칠을 이어간 날도 있었다. 수능 공부 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며 억지로 앉아있었다. 동기부여되는 자기개발서를 읽고, 테드나 유명인사의 강연을 들으며,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견뎌보았다. 그러나 살아가는 이유나 삶의 목적따위는 잊은 채, 그저 한심한 인간이 되지 않고자 했던 내 발악은 오래가지 못 했고, 다시 주저 앉았고,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왔다갔다 하며 흘러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사서 읽었던 책이었다. 제목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약 1년 간 어떤 자극을 받아도 별 감흥이 없거나, 일시적인 각성 효과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책이 눈에 들어왔던 순간에, 이 전에 이 책을 읽고 뭔가 느낀 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내용이 뭐든 내가 느꼈던 바가 뭐였든, 별반 다를 거 없을 거라고.

 

그렇게 넘어가버리고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책이 계속 눈에 밟혔다. 왠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했다. 노란색의 이 책이,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책을 펴들었다. 예전에 내가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어두었던 부분, 메모해두었던 생각의 기록들이 보였다. 무기력해진 지금의 내가, 고민이 많았던 그 때의 나를 마주하면서, 오히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들어왔고, 내가 잊고 지내왔던 중요한 무언가를 일깨워줬다.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 교수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었던 사람이다. 그는 극한의 환경에 내몰린 인간들의 행동과 선택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며 인간의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로고테라피' 라는 정신의학/심리학 이론을 성립한다. 로고테라피의 내용은 방대하겠지만, 이 책에서 일부 소개한 부분 중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나도 어떤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낙서? 같은 거지만... 앞으로의 나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진지하게 했던 것 같다. (먼저 두 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뒷 부분에서 해당 내용은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이 선택권을 가지는 단 한가지의 자유가 있다.  

 

 

 

 

그 것은 바로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 이다. 긍정에너지로 가득차있었던 대학시절을 떠올려보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 같다. 매일매일 쉴틈없이 무언가를 해냈던 그때는, 순간순간이 힘들더라도,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는 경험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육체의 고됨이나 아이디어를 쥐어짜내야 했던 정신적 스트레스들이 견딜만 했고, 때때로는 과정의 힘듦마저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무슨 일이 주어지면, 혹은 하고 싶어지면,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일단 덤벼들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나의 태도들은 결국 성과로 이어졌고, 몇몇 성과들이 모여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최근 1년간의 나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면, 거의 정 반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든 하려고 들면, 두려웠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부족하다 못 해 거의 바닥을 쳤다. 하지만 현재의 무능함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지를 부여잡고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미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내 머리는 이내 움직이기를 거부했고, 작심삼일을 반복하다 결국 나는 수렁에 빠져버린 트럭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늘 그렇듯 하루종일 특별히 한 것 없이 보냈던 그 날, 잠자리에 드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왜일까?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걸까..?' 나를 믿고 있을 가족들이 떠오르면서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바보같이 계속 눈물이 났다. 이런 전개라면 나는 다음 날부터 열심히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극적인 일이 있었지만 나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고, 수십일이 지나서야 정신이 잠깐 든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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